최근 작업들에서는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1(<Study>, <Taping>, <Sisters>, <XY>)에서는 순간적이고 부분적인 이미지들이 주를 이루며, 특히 신체나 신체와 관련된 사물을 주제로 한다. 여기서 신체 또한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관절들이 전면에 배치되거나, 분할되고 잘려진 부분들이 강조된다. 3(<Study of trees>, <Study>)에서는 불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는 것들로 특히 자연이나 주변 풍경이 주를 이룬다. 4(<Filleting>, <Peeling a sausage>, <Massage>, <Snails>)와 5(<Untitled>)에서는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사물이나 풍경에 관한 것으로, 그 이미지들을 조합, 배열하여 시간의 흐름이나 전개방식에 따라 서사성을 가지게 되거나, 반대로 서사를 없애고 무의식적인 흐름들을 배치하여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3의 작업에서 풍경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라기보다, 작가에 의해 구성되어진 것에 가깝다. 작가는 완전함이나 재현에 대한 불가능성에 근거했을 것이다. 1분 1초 단위로 사라지고 없어져 버리는 세계에서 포착되지 않는 리듬들을, 사진과 같이 정확하게 혹은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이나 리듬들로 전유하여 포착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주 잠깐이고 곧 사라져버릴 것들이지만, 나름의 리듬을 가지고 살아‘내고’있는 것들에 대한 시각을 잃지 않으려 하는 작가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때문에 이전의 작업이 ‘보이는 것’에 대해 집중했다면, 이후의 작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집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작가는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들로 전환하여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므로 더욱 예민하고 민감해져야 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뚜렷한 목표로서 대상이나 결과물이 없기 때문에 작가는 여러 번의 드로잉을 거듭해야 하며 그 안에서 각각의 선, 면, 이미지들은 삭제되고 선택되고 다시 조합되는 과정들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그 과정에서 작가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이 발생하게 되고 때문에 작가의 신체와 운동은 더욱 민감해지며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준화 작가 작업의 결과물은 순간적으로 표출되거나 사라지게 되고, 결과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
2. 공백: 그럼에도 보려고 하는 것
그럼에도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순간적이거나 완전하지 못함에서 오는 공백이라기보다, 그 감각과 표현들이 평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사물이나 풍경의 리듬, 시선의 전환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을 특유의 색감이나 선, 터치, 레이어의 겹침 등 여러가지 기법으로 나타내지만, 그 이상의 의미나 주제의식을 찾아보기에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그리는 행위’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공백 속에서 작가가, 그럼에도, 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공백을 통해 관객 그리고 세계와 어떤 말들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