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Paint―ing and (Re)animation or Taping





1. 양준화의 드로잉은 페인팅으로 확장된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작업은 그리기라는 차원에서는 동일한 외양을 갖지만, 전혀 다른 양식으로 간주해야 한다. 드로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작업이 페인팅으로 옮겨지는 작업이라고 해도, 드로잉에서 고안된 형상들과 페인팅을 통해서 전개되는 형상이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이 양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거나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은 가정을 통해서 이 문제를 살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드로잉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어떤 움직임의 연속적인 지점을 순간적으로 포착해서 다룬다. 가령, 생선 해체 드로잉은 총 13개의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다. 이에 반해 페인팅은 이 과정에서 두 가지 드로잉이 삭제되거나 함축됨으로써 11개의 이미지로만 구성되어 있다. 생선 해체 과정 가운데 일부분이 페인팅으로 전개될 필요가 없었거나, 11개의 페인팅 내부에 2개의 이미지가 녹아들 수 있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즉 드로잉이 현실의 어떤 움직임들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페인팅은 재현된 드로잉을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현실의 어떤 순간들이 아니라, 그려진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그리는 과정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현실-재현→재현-재현). 물론 양준화에게 드로잉과 페인팅이 맺는 관계는 단순히 드로잉을 통해서 페인팅으로 전개되거나 함축되는 방식으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2. 드로잉 작업에서도 단순한 현실 재현의 과정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대목들도 있다. 13개의 이미지의 연속은 이미지 자체의 운동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드로잉이 현실 재현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일테면, 유사한 이미지의 연속된 장면은 이미지의 운동을 지각하게 만들어 주는데, 이런 방식으로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이 현실을 담아낸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알려진 애니메이션은 현실의 운동을 모방하거나 따르지 않고 애니메이션 자체의 규칙을 따른다는 점에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다만 그려진 이미지를 사진으로 담아내고 이를 기술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연속적인 운동을 드러내주는 것인데, 1초에 최소 2개의 프레임의 반복만으로도 애니메이션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실제로 네온싸인의 점멸을 애니메이션으로 보기도 한다). 애니메이션의 규정과 정의가 상이하지만, 서로 다른 두 이미지나 프레임 사이의 의미 있는 배치가 이루어질 때를 모두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운동 과정으로 영사되거나 상영되지 않는다고 해도 애니메이션으로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생선 해체 드로잉의 배치는 이런 관점에 따르면 (그리고 최소한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방식을 따르면) 애니메이션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계적 장치나 기술적 장치를 통해서 ‘상영’되거나 ‘영사’되는 경우에, 이를 ‘리애니메이션’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만약, 드로잉과 페인팅 사이의 관계가 서로 다른 물리적 매체이자 기술적, 기계적으로도 상이한 매체라고 규정해야 한다면, 드로잉에 대한 ‘리애니메이션’이 페인팅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생략되거나 함축되는 것은 ‘리애니메이션’에서 삭제되거나 은폐된 이미지라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드로잉은 ‘애니메이션’이고 페인팅은 ‘리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이 작업들이 영상으로 제작된다면, ‘리리애니메이션’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한정 애니메이션에 ‘re’를 덧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를 ‘디지털’로 규정한다. 대부분의 영상 이미지는 디지털로 아카이빙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양준화에게 드로잉이 단순히 페인팅의 밑그림이나 수단일 수 없다. 하여, 드로잉과 페인팅이 배치되는 방식이 함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따져야 한다. 달리 말해, 독립적인 방식으로 드로잉 하나와 페인팅 하나를 개별 텍스트로 다룰 수 없다. 양준화는 어쩌면 세계를 ‘애니메이티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3. 2013~2014년 드로잉은 주제적으로 해체 혹은 해부이고 2015년은 신체와 신체의 마주침과 접촉, 신체와 테이핑의 결합에 관련되어 있다. 서로 상이한 주제이지만, 이 두 주제는 신체의 부분들이 핵심이다. 손과 발이 그것이다. 두 시기 동안 손의 역할을 양준화는 두 가지로 바라본다. 하나는 대상의 해체이고 다른 하나는 신체의 회복과 안정으로 다룬다. 그리고 가시화되지 않지만, 저 두 가지 드로잉을 그리는 것 역시 ‘손’이다. 해체/해부와 결속은 손의 고유한 제작술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이나 존재의 해체/해부는 회화사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지만, 양준화의 해체/해부는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는 작업에 관심을 두지 않고 운동의 영역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운동을 다루되, 그것을 다시 운동으로 배치하고 배열하는 데에 대한 관심이 양준화 작업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발(신체의 각종 부분들은 모두 발이다)은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 것은 관계 방식을 통해 맺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발은 손 곁에 있어야 하고 손은 항상 발에 인접해 있어야만 한다. 양준화의 그림 내용이 그러하듯, 지압을 하기 위해선, 지압하려는 대상이 항상 있어야 한다. 지압하는 ‘손’이 주체가 아니고 지압되는 ‘발’이 반드시 대상인 것이 아니라, 이 둘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테이핑을 한 발이나 다리가 등장할 때에도, 거기에는 손이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테이핑은 드로잉이나 페인팅과 같은 의미 맥락 속에 있는 ‘그리기’의 한 방식으로 가정해 볼 수도 있다. 지각되지 않는 근육이나 힘줄을 가시화하는 방식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테이핑은 해부/해체이며 결속이다.



4. 양준화의 드로잉이 아직은 현실적 이미지에 개입하는 작업이며 그것이 손과 발로 나타난다면, 페인팅은 그 과정을 아크릴을 통해 이미지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이다. 양준화의 페인팅은 아크릴을 아주 얇게 쓰지만, 부드러운 색감을 통해 이미지의 형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차라리 종이의 표면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조차 있어서, 형상 자체를 그리려는 방식보다는 드로잉에서 가져 온 이미지를 인화하는 방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드로잉이 보다 ‘사실적’이라면, 페인팅은 보다 ‘이미지’ 자체에 충실하다고 번역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사진 이미지를 통해서 확인해서 그러하겠지만) 드로잉보다 톤다운 된 것처럼 인지된다. 물론 완전한 복사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다. 같은 톤으로 제작할 때, 페인팅은 드로잉에서 보여주었던 속도나 느낌을 제공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2015년 페인팅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흥미로운 소재가 있다. 압박붕대 혹은 실/천(양말)이다. 특히 실/천은 드로잉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페인팅이 드로잉의 계기와 다른 방식으로 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통적인 징조일까? 아니면 페인팅이 드로잉과는 완전히 다른 체계와 시스템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섣불리 진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붕대나 실/천은 연결하고 매개하는 것이다. 고장 나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두 세계를 감싸는 방법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양준화의 작업은 무엇을 테이핑하려는 것인지 물을 수 있다. 작가야 관객들이나 세계와 연결되고자 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이미지 자체가 전달하는 정보가 다소 모자라다. 불투명한 색감과 형상을 통해서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감각’이란 무엇인가?



5. 감각 자체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기’가 아니어도 충분하다. 오히려 훨씬 다양한 대중미디어가 사유의 영역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도록 관객들을 감각에 정지시키는 데에 능수능란한 힘을 발휘한다. 회화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이를 스펙터클이라고 부를 수 있다. 회화가 중요하게 취급하는 ‘감각’이 그와 같은 것이라면, 회화를 해야 할 까닭에 대해서는 없으니, 대상의 리듬감이나 조합 등이 그려져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려진 이미지가 ‘리듬’을 줄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살아 있는 생생한 리듬은 그림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물어야 한다. 한편 그 작업을 시각적 감각으로 ‘감지’하는 것으로 그쳐도 좋은 것이라면, 크리틱의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는 작업 방식과 이를 다시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낳게 만든다. 작가는 감각 자체를 붓과 색감과 선이나 면을 통해서 ‘번역’하지만, 이 번역된 것이 관객에게 ‘감각’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색감이 참 좋다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이미 일종의 ‘비평’이기도 하다. 그 따스함의 정체는 관객들마다 다른 것이겠지만 자신의 근거로부터 출발해서 진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감각을 드러냄으로써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하고 그것이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평론가 김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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